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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 행촌동 붉은 벽돌집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기자명 : 장예원 입력시간 : 2018-10-02 (화)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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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암 근린공원에서 서대문역 방향으로 쭉 가다보면 왼쪽으로 휘어진 골목길이 나온다. 그리고 골목길이 꺾어지자마자 2층 주택이 마치 터주 대감처럼 자리 잡고 있다. 빌라와 아파트 사이에서 고색창연한 붉은색 벽돌로 만들어진 이 집의 이름은 딜쿠샤(Dilkusha)로 힌두어로 이상향 혹은 기쁨을 뜻한다. 장독대로 사용되던 공간 안쪽에 딜쿠샤와 1923년이라는 숫자가 화강암에 새겨져있다.
이 저택의 주인은 앨버트 테일러로서 원래는 광산업과 무역업을 하던 사업가였다. 앨버트 테일러와 우리의 인연은 그의 아버지인 조지 테일러부터 시작된다. 금광 기술자였던 그는 대한제국 정부가 미국에 불하한 운산금광에서 일하기 위해 입국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앨버트 테일러 역시 아버지와 함께 금광에서 일을 하면서 무역업에 종사했다. 그에게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이 땅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은 남의 나라 일에 불과했다.
하지만 1919년 3월 1일, 그는 남의 나라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일본경찰이 찾아다니던 독립선언서를 앨버트 테일러의 아내 메리 린리 테일러가 입원한 세브란스 병원의 병실에 숨겨둔 것을 우연찮게 발견한 것이다. 그는 이렇게 입수한 독립선언서를 동생을 통해 일본으로 가져가게 해서 전 세계에 알리도록 했다. 아울러 일본이 3.1만세 운동을 일으킨 보복으로 군대를 동원해 제암리 마을과 교회를 불태우고 주민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앨버트 테일러는 스코필드 목사와 더불어 제암리 학살 사건을 취재하고 이를 세계에 알리는 한편, 조선 총독부에 엄중하게 항의했다. 덕분에 그는 몇 달 동안 감옥에 갇혀야만 했다.
딜쿠샤는 그런 앨버트 테일러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곳이다. 옥고를 치른 앨버트 테일러가 가족과 함께 살기 위해 1923년 지은 이 저택이 딜쿠샤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영국인 아내 메리 린리 테일러 때문으로 추측된다. 일반적인 서양식 주택보다 훨씬 커서 한 때는 어니스트 베델이 양기탁과 함께 운영하던 대한매일신보 사옥으로 추정되기도 했다. 측면의 뾰족한 박공과 긴 창문은 전형적인 서양식 주택의 특징을 보여준다. 내부는 연회장과 식당, 욕실이 딸린 방과 식료품 창고 등이 있었는데 앨버트 테일러는 이곳에서 1942년까지 지내다가 태평양 전쟁이 터지자 일본에 의해 추방당한다.
딜쿠샤는 여러 주인을 거치다가 1963년 국가 소유물이 된다. 하지만 관리 소홀로 인해서 입주자들이 들어와서 얼마 전까지 거주했다. 이들은 딜쿠샤 내부와 외부를 뜯어고쳐서 내부와 외부 모두 원형이 심하게 손상되었다. 딜쿠샤는 오랫동안 진짜 주인이 누군지 알려지지 않았다가 2006년 앨버트 테일러의 아들 브루스 테일러가 대한민국을 방문하면서 비로소 사실이 밝혀지게 된다. 이후 서울시는 등록문화재로 지정하고 기념관으로 만들기 위해서 노력 중이다. 앨버트 테일러는 자신의 나라도 아닌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을 희생했다. 딜쿠샤는 그의 흔적이 남은 장소이기 때문에 오랫동안 보존하고 기억해야만 한다. <저작권자 © 특수경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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